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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성인대축일: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기리며 - 無名, 無己, 無功
글쓴이 : 박성칠 날짜 : 2018-09-23 15:09:47

순교성인 대축일                                                                                    2018. 09. 23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1 독서).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신앙을 위해 돌아가신 님들을 그리워하고 그분들의 신앙을 닮아보고자 노력하는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순교 성인 대축일을 지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순교 성지가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해미성지를 좋아합니다.

신학생 시절 한 여름 소나기를 맞으며 도보로 순례를 했던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미는 대부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재판 절차(기록) 없이 처형된 성지입니다.

이곳에서 이름 없는 무명의 신자 수천 명이 순교하셨습니다.

 

신자들을 한 명씩 처형하면서 관헌들은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신자들은 수십 명씩 짝을 이루어 해미 동구 밖 서쪽으로 끌려갔습니다.

나무가 많이 우거진 곳으로 숲정이라 불렸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신자들은 산 채로 구덩이에 파 묻혔습니다.

그것이 바로 잔인한 떼 생매장이었습니다.

 

옛날엔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던 뼈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누워 있지 않고 수직으로 서 있었다고 하죠.

살아있는 사람들을 산 채로 생매장 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구덩이에 묻히면서 한결같이 예수, 마리아!” 하고 하늘에 외쳐 간구했습니다.

외교인 구경꾼들은 그 소리를 여수 머리로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여우에게 홀려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이라 불렀습니다.

 

둠벙이란 단어는 웅덩이라는 뜻의 충청도 방언입니다.

물웅덩이나 개울, , 작은 저수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관원들은 신자들의 두 손, 두 발 꽁꽁 묶어 둠벙 물속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는데 아마도 죄인 둠벙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죄인들을 빠뜨려 죽였던 둠벙이라는 뜻이겠지요.

 

많은 순교자들이 이름을 남겼지만 해미의 순교자들은 이름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아마도 이 분들은 양반 가정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던 분들이 아니었을 겁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던 민초(民草)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관에서도 이들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겠지요.

 

우리나라 유교 선비들이 목숨같이 생각하고 받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身體髮膚 受之父母).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不敢毁傷 孝之始也).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떨침으로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부모님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다 (以顯父母 孝之終也)."

 

그러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은 결코 후세에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몸과 뼈가 훼손될지언정 신앙의 훼손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모를 위해 이름을 드날릴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신앙을 지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장자에 성인무명 (聖人無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름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읽어 봅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성인이요, 거룩한 사람들이다.”

 

오직 신앙을 위하여 자신을 털끝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던 분들 (至人無己)!

순교를 자신들의 공으로 돌리지 않았던 분들 (神人無功)!

세상에 이름 석 자 남기기를 원하지 않았던 분들 (聖人無名)!

이분들은 이름이 없어 결코 성인품에 오를 수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이야말로 진짜 성인이요, 성인들 중의 성인들일 것입니다.

 

순교로 빛을 밝인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 안에 큰 나무 되니

님 따른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찬송을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 빛 되소서

 

성가 285번의 1절 가사입니다.

저는 이 노래에 가사를 붙인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103위 성인을 기리는 노래에 무명 순교자들을 위한 따뜻한 자리를 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사가 선생님은 성인들과 함께 무명 순교자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름을 남긴 분들과 이름 없는 분들이 하나 되어 순교로 주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목숨을 던져가며 주님을 증언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며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땀의 순교라 하고 녹색 순교라 합니다.

이 미사 중에 순교성인들의 후예(後裔)로서 더욱 잘 살 수 있도록 은총 청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무명의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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